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폰 브라우히치 (문단 편집) === [[전간기]] === [[독일 제국]]이 패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강제로 군축이 시행되었으나 브라우히치는 군에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종전 직후에는 전쟁성의 포병부에서 근무하였다. 이때 자신의 전공 분야인 포병 교리를 발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25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였고, [[1927년]]에는 [[대령]]이 되어 육군 훈련부로 배속되었다. [[라팔로 조약]] 체결 이후 병무국 교육과장으로서 소련에 6주간 머물며 소련군의 기갑 부대를 접하고 이를 활용한 기동전 교리를 적극 도입하게 된다. 이때 그를 수행한 주요 인물이 장군참모로 병무국에 근무 중이었던 [[발터 모델]]. 4년 뒤인 [[1931년]]에는 [[준장|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나치 독일|제3제국]]을 수립할 때 당시 [[중장]]이던 브라우히치는 [[동프로이센]] 지방을 관할하는 사령관이었다. 이때 그는 동프로이센에서 활동하는 나치당원인 [[에리히 코흐]](Erich Koch)[*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잔혹한 탄압 정책을 펼쳤던 전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브라우히치는 처음부터 나치당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도 있던 데다가 그는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유화 정책을 펼쳐 주민들에게 인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인종 정책을 펼치는 나치당이 활개치게 방조해서는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것도 있었다. 코흐와 브라우히치의 갈등은 계속 이어지는데 결국 브라우히치는 [[하인리히 힘러]]와도 마찰을 겪게 되었다. 힘러가 동프로이센 지방에 있는 군대를 해산시키고 그 자리를 [[무장친위대]] 인원들로 채우려 했는데[* 당연히 [[유대인]] 등 나치당의 인종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몰살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브라우히치가 그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무장친위대가 진주하는 것은 무산되지만 힘러는 앙심을 품고 이를 히틀러에게 일러바쳤다. 그러나 별다른 일은 없었고 [[1936년]]에는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런데 이때 히틀러와 브라우히치의 관계를 바꾸는 일이 하나 일어났다. 브라우히치는 1910년에 결혼해 자녀까지 두고 있었는데 나치당에 반대했던 그가 출세를 위해 아내를 버리고 나치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젊은 여성과 결혼하려고 한 것이다. 지독한 금욕주의자였던 히틀러는 타인이 이혼하는 것을 굉장히 좋지 않게 보았지만[* 괴벨스도 한때 아내와의 불화로 이혼하고 싶다고 자주 하소연 했지만, 아내가 괴벨스 못지않은 나치 열렬지지자였던터라 히틀러가 절대 허락해주지 않았다.(...)] 브라우히치가 이혼하려 드는 것은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재혼 비용으로 8만 마르크를 빌려주었다. 결국 브라우히치는 아내를 버리고 재혼에 성공하며 자신과 알고 지내던 독일군 장성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물론 히틀러에게 진 빚은 그대로 있었고 이후 히틀러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원래 그는 나치당 자체는 혐오했으나 재군비 정책에는 찬성하던 인물이었고,[* [[독일 제국|제2제국]] 시절급의 군대 복원은 당시 독일 장군 전원의 공통된 염원이었다. 자신들 생전에 그게 이루어지리라 믿고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에서 승진 정체도 견디며 20년을 견뎌낸 사람들이니.] 히틀러의 연설 능력에 반해 히틀러도 개인적으로 지지하던 상황이었다. . || [[파일:external/www.nndb.com/brauch-sm.jpg|width=100%]]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e742f29896e009affd931dbb89cdc00.jpg|width=100%]] || ||<-2>▲(좌)컬러로 복원한 사진. 1939년 카셀에서 열렸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행사때의 경례모습이다.](우) 1939년 [[9월 25일]]자 [[타임(주간지)|타임]]지 표지로 선정된 브라우히치. || [[1938년]]에는 육군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이 [[동성애자]]라는 일명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터졌고, [[독일 국방군]] 내에서 고위직에 있던 프리취 장군,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장군이 쫒겨나고 내부 인원이 물갈이되며 국방군은 그 전보단 확연히 히틀러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브라우히치는 프리취 장군의 뒤를 이어 육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원래는 히틀러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내정되었지만 라이헤나우가 알아주는 나치 추종자였던지라 국방군이 [[슈츠슈타펠]]과 동급의 나치당 휘하 사설 무장 조직으로 전락할 것을 염려한 장성들, 특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육군 총참모장으로 내정된 할더가 반발해 브라우히치가 육군총사령관이 되었다.] 동시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나치당에 반대했던 [[루트비히 베크]]처럼 그도 [[안슐루스]]와 [[뮌헨 협정]]에 반대했으나 뮌헨 협정이 성공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에게 합병된 후에는 국방군 내 분위기가 대외적으로 매우 호전적인 모습을 띠게 되고 브라우히치도 이에 동조하게 되었다. 루트비히 베크는 브라우히치에게 '[[녹색 작전|만약 히틀러가 계속 체코슬로바키아를 넘본다면]] 육군총사령관으로서 모든 육군 [[장군참모]]들을 사퇴시킬 것'을 계속해서 촉구했지만 결단력이 없던 데다 히틀러에게 빚까지 지고 있던 상황인지라 브라우히치는 결국 체코 합병을 묵인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